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(문단 편집) === [[여소야대]]를 노린 [[민주통합당|야권]][[통합진보당|연대]] === 야권은 [[MB정부]] 심판론을 내세우며 [[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]]에서 야5당 연대로 [[서울시장]]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는데, 이후 2011년 11월 [[이명박 정부]]와 [[한나라당]]이 국회에서 [[한미자유무역협정|한미 FTA]]를 다수결처리 하면서, 수도권을 중심으로 야권 지지층의 결집이 더욱 거세지게 되었고, 이에 야권은 총선 승리를 다짐하며 여소야대를 노리게 된다. 그해 12월, [[민주당(2008년)|민주당]]은 원외 친노/시민 세력([[시민통합당]])과 [[민주통합당]]을 창당했으며, [[민주노동당]] - [[국민참여당]] - [[진보신당]] 탈당파([[새진보통합연대]])는 2012년 1월 [[통합진보당]]을 결성했다. 범야권 정당이 5개 정당에서 2개 정도로 감소하면서 야권연대 및 후보 단일화는 활발해졌다. 결국 3월 19일, 야권연대 후보가 결정되었다. 주요 선출된 후보는 민주통합당의 [[인재근]] 후보[* [[김근태]] 전 의원의 부인.]와 통합진보당의 [[이정희]] 공동대표 등이었다. [[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]]과 [[이명박 정부]] [[레임덕]]으로 계속해서 카운터 펀치를 맞자 위기를 느낀 [[한나라당]]은 2011년 12월 [[박근혜]] 전 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. 박근혜는 [[노태우 정부]] [[대통령비서실]] [[경제수석비서관|경제수석]]이었던 [[김종인]][* 실제로 노태우 정부는 김종인의 영향력 때문에, 역대 보수 정부들 중 경제정책이 가장 좌클릭한 편이다. 하지만 이후 김종인은 [[민주당계 정당]]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했기 때문에 박근혜가 영입했을 당시에는 야권 인사였다.]을 비대위원으로 영입해 좌클릭 행보인 [[경제민주화]] 어젠다를 내걸었다. 또 청년층 지지를 얻기 위해 당시 26살의 청년이었던 [[이준석]][* 이준석이 정계에 입문한 계기가 박근혜인만큼, 처음 이준석은 박근혜 키즈의 대표주자로 불렸다. 다만 김종인과 비슷하게 이준석 또한 박근혜에게 쓴소리를 하면서 점점 멀어진 케이스. 이후 유승민계로 분류되던 이준석은 2020년대 이후부턴 독자적인 [[이준석계]]를 만드는 나름 덩치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나, 윤석열 정부 들어 [[친윤]]계와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.]도 비대위원으로 영입했으며, 2012년 2월을 기해 당명도 [[새누리당]]으로 바꾸는 등 당의 이미지 개선에 심혈을 기울인다. 이후 새누리당의 [[친이]]계 의원들이 공천 반발로 탈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대부분 불출마로 끝났다. [[http://media.daum.net/2012g_election/newsview?newsid=20120315133010717|#]] 사실 전직 친박계로 18대 총선에서 이미 공천 보복을 당한 [[김무성]][* 2008년까지는 [[친박]]으로 분류될 수 있었으나, 2009년 당시 [[이명박]]이 [[세종특별자치시]] 수정안(=행정도시 취소안)을 추진할 때 이에 찬성하였고, 2010년에는 친이계가 제시한 한나라당 원내대표 자리를 수락하면서 박근혜와 사이가 멀어져 19대 총선 당시에는 친박이 아니었다. 이후엔 알다시피 화해와 갈등을 반복하다 결국엔 비박계의 수장이 된다.]이 복수심에 다시 친이계 의원들과 [[국민생각]], 자유선진당까지 크게 뭉쳐서 3번으로 4~50여개 지역구에서 출마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, 마지막 순간에 실현이 어렵고 탈당이 소신과 어긋난다는 생각에 중단하였다. 새누리당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고, 야권으로서는 아쉬운 시나리오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